1617년 스페인 식민 치하의 필리핀. 엔시소 신부는 폭력적 통치와 성적 착취를 일삼고, 원주민의 토속 신앙을 미개한 것으로 치부하며 가톨릭 개종을 강요한다. 그는 아들 둥웬에게 교회 건축용 대리석 운송을 명령하고, 이들 일행은 악명 높은 약탈자 바리바리의 위협을 피해 50km가 넘는 험난한 길을 지나야 한다. 엔시소가 세우려는 교회는 숭고한 구원의 상징이 아니라 원주민의 피와 강제 노역으로 얼룩진 폭력의 증거다. 전작 <마젤란>(2025)에서 식민주의의 신화적 기원을 뒤흔든 라브 디아즈는, 이번 영화에서 토지·노동·종교를 통해 식민 질서가 구축되는 미시적 물적 토대를 파고든다. ‘지나가겠습니다’라는 뜻의 타갈로그어 원제 Makikiraan Po는 차단된 역사와 공동체로 향하는 통로를 요청하는 절박한 호소다. 영화는 서구적 질서 뒤에 감춰진 폭력의 기억과 유령을 소환해 지워진 역사의 아카이브를 재구축하려는 감독 특유의 격렬한 저항이자 성찰의 기록이다.
1958년 필리핀 민다나오 출생. 주로 필리핀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을 다루며 <프롬 왓 이즈 비포>(2014)로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 <떠나간 여인>(2016)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2016)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받는 등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했다. 그 외 연출작으로 <멜랑콜리아>(2008), <위대한 실종>(2013), <부서지는 파도>(2022), <호수의 깊은 진실>(2023), <판토스미아>(2024), <마젤란>(2025) 등이 있다.